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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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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오영수

문인들과의 일화

따뜻하고 인정 많은 성격이었던 작가는 많은 문인들을 아꼈는데 그 중에 천상병 시인이 있다.

천상병 시인을 끔직이도 아낀 나머지 집에서 기식하도록 배려해 주고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책상 고무판속에 술값과 차비를 넣어둔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정형남, 「향토에 묻은 오영수의 문학과 생애」, 『울산문학』


이와 관련한 내용이 ‘관철동 시대’라는 칼럼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오영수의 식객으로 머물던 천상병이 용돈을 주지 않고 출근한 오영수를 골탕 먹이려고 오영수가 가장 애지중지하던 펠리컨 만년필을 숨겨버려 오영수가 안절부절하다 퇴근 후 천상병에게 사정사정하여 펠리컨 만년필을 돌려받고 두둑한 용돈을 주었다는 그런 내용이다.

 당시 천상병은 우이동골짜기 오영수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고 있었다. 현대문학지의 편집장이던 오영수는 천상병을 아끼는 사람중의 하나여서 동가식서가숙하는 그를 자기집에 묵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80원씩 천상병에게 주기로 했는데 그것은 시내로 나가는 버스삯과 담배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퍼지도록 늦잠을 자고 해가 중천에 뜰 때 겨우 일어나는 천상병이 아침마다 출근하는 오영수와 그 돈을 주고받을 시간이 맞을 리 없었다. 그래서 오영수가 출근하기 전 자기 책상 고무판 밑에 80원을 넣어두고 천상병이 아무 때나 그걸 꺼내가는 그런 식으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천상병이 고무판 속에 손을 넣어보았으나 돈이 잡히지 않더라는 것이다. 고무판을 홀랑 까뒤집어도 동전 한 닢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날 회사에 출근한 오영수는 아침부터 안절부절 못했다. 천상병에게 80원을 남겨놓고 오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던 것이다. 한번 오기를 품으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싶었던 것이다. 퇴근 시간을 다 기다리지 못하고 영수는 우이동행 버스를 탔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우선 책상서랍부터 열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애지중지하던 펠리칸 만년필이 없어진 것이었다.
 천상병은 우이동 오영수의 집을 나설 때 이미 그를 골탕 먹일 장치를 해놓았던 것이다.
 “상빙아, 저녁 묵었나?”
 “제가 언제 저녁을 먹습니까? 막걸리 한사발이 저녁이지요”
 “그럼 왕대포 한잔 받아줄까?”
 “방금 한잔 마시고 왔습니다”
 “한잔 더 묵어라”
 “시간이 돼야 묵지요. 저는 한꺼번에 한잔 이상은 안마십니다”
 어차피 마지막 카드를 꺼내야 할 판이었다.
 “그럼 좋다. 펠리킹은 아직 그대로 있제?”
 천상병은 아까부터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상빙아, 니 요즘 용돈 없제? 내 오백원 줄까?”
 거래가 성립하는 순간이었다. 천상병이 빙긋 웃자 오영수가 5백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천상병이 그걸 받고 아쉬운 듯 펠리칸을 건네주었다.
 “고맙다 상빙아! 오늘 저녁 일찍 들어와. 술 너무 많이 하지 마라”
 관철동시대 70년대 한국 문단 풍속화 (3) 오영수의 「펠리칸」, 경향신문 1986. 3. 15 기사(칼럼/논단)


천상병 시인의 부인인 목순옥씨와도 인연이 있었다.

목씨가 난계를 잊지못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77년의 일이다. 예술원상을 수상한 난계 오영수와 우연히 한차례 만난적도 있었다. 그때 난계는 목씨의 손을 끌어당겨서는 봉투 하나를 넌지시 쥐어 주었다. 돈봉투였다. 예술원 부상으로 받은 상금중 당시 돈으로는 적지않은 액수인 10만원을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 난계는 그 돈을 꼬옥 간직하고 있다가 아주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생활이 어려울 때 쓰라고했다. 목씨는 난계와의 추억중 이런 일화도 간직하고 있었다. 궁핍하게 사는 생활이 안스러웠던지 어느날 천시인과 목씨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천시인에게 꾸중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나름대로의 지침을 일러주었다. 그 지침의 끝머리에다 난계는 “순옥이를 고생시켜서는 안된다” 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신춘희,「오영수에 관한 두 편의 기록」, 『울산문학』


소설가 윤정규와 황석영은 오영수를 이렇게 기억한다.

필자가 오선생을 직접 뵈온 것은 아마 1952년도가 아니었던가 기억한다. 오선생이 우리반 담임으로 부임하셨다.
부수수한 곱슬머리, 테굵은 안경, 바싹마른 몸매, 얼굴은 말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고교입시를 앞둔 때였기 때문에 선생도 입시위주의 수업을 하셨다. 그러나 선생님 스스로 그런 수업을 싫어하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학생들이 지겨워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학생들의 기분을 살피신 선생님은 이따금씩 자작미발표 작품들을 낭독해 주셨다.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는 작품이 「아찌야」란 것이다.
오선생님의 작품낭독은 우리들로 하여금 교과서 이외의 읽을거리를 최초로 접하게 해준 기회였다.
필자에게는 오선생이 최초로 문학이란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 분이었다.
윤정규(소설가),「오영수선생과의 만남」, 『울산문학』


 오영수는 슬하에 장녀 숙희, 장남 윤, 차남 건, 차녀 영을 두었다. 원래는 육 남매였는데 차녀 국과 장남 철이 차례로 죽었다고 한다. 나는 이들 사 남매와 잘 알고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 초에 나는 결혼하고 나서 집세가 비교적 싸고 작업 환경도 좋은 서울 북쪽 변두리 우이동 골짜기로 찾아들었다. 내가 살던 집은 손병희 묘와 천도교회관을 지나 북한산으로 오르는 시냇가 근처에 있었고, 오영수 선생 댁은 버스종점 지나 우리 집으로 오르는 초입에 있었다. 김지하 얘기가 또 나오지만 나는 그와 더불어 1970년대 초부터 ‘문화운동’을 벌일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오영수 선생의 장녀 오숙희와 오윤은 서울대 미대 회화과와 조소과를 차례로 졸업했고 김지하는 미학과(당시는 미대 소속)를 다닐 때부터 윤의 누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1969년에 김지하 김윤수(미술평론)와 함께 오윤 오경환 임세택 등이 ‘현실’전을 기획하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전시회는 중단된 일이 있었다. (중략)
 문화운동1세대라고 하는 이애주 채희완 임진택 김민기 장선우 김석만 이상우 등이 ‘김지하의 당부’를 받고 나를 선배 삼아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통해서 오숙희 오윤 남매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선생의 집은 당시만 해도 우이동이라면 시골과 매한가지여서 집터가 오백여 평쯤 되었다. 뒤뜰에 텃밭과 울창한 아카시아 나무숲이 있었다. 두 딸과 오영수 부부는 안채에 살았고 대문간에 방 두 개짜리 별채가 있었는데, 윤과 건이 형제가 쓰고 있어서 그곳은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 소주병과 안주거리를 들고 모여서 그림이며 영화며 책 얘기를 밤새 떠들었다. (중략)
 오영수 선생은 우리의 이러한 출입을 모를 리 없겠건만 어쩌다가 거실에서 보게 되면(당시에 나는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중이었다.) 그저 간단한 안부나 묻고 문학 얘기는 서로간에 일체 나눈 적이 없었다. 그는 유화 소품도 그리고 난도 치며 그야말로 그의 낡은 베레모처럼 ‘장인’적으로 보였는데, 작품과 사람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건만 나는 어쩐지 그가 늙은 ‘이제하’처럼 보였다. 마치 일본식 근대가옥이 즐비한 항구 거리의 모퉁이에서 나온 ‘모단’한 쟁이로 보였다고나 할까. 아버지의 인정주의 내지는 순수주의에 비해서 오윤은 당대 민중의 삶과 유리된 예술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당시에도 오영수의 단편소설이 어쩐지 오윤의 판화에 등장하는 양식에서 그리 거리가 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차남 건이는 그 무렵에 결혼하자마자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했는데 아마도 누나와 형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선생은 아들에게 시골 농토를 살 돈을 마련해주느라고 그 넓고 푸르렀던 우이동 집을 팔고 쌍문동의 자그마한 집장사 집을 사서 이사했다. 나도 쌍문동의 방 두 칸짜리 한옥으로 이사했던 무렵이고 근방이어서 가끔씩 그 집에 들르곤 했는데, 전보다 옹색해졌고 선생도 울적해 보였다.
[출처] [황석영의 한국명단편 100선] 22. 오영수 단편소설_「명암」 (::문학동네::) |작성자 황석영

[ 참고문헌 ]
이재근 「오영수 소설 연구」, 목원대 박사논문, 2011
이재인, 『오영수 문학 연구』, 문예출판사, 2000
정형남, 「향토에 묻은 오영수의 문학과 생애」, 『울산문학』 제19집, 199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