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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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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오영수

귀향

오영수는 현대문학 창간 멤버였던 주간 조연현으로부터 점차로 배척을 당하자 이로 인한 소외감과, 1966년에 위궤양으로 인해 직장이었던 현대문학사를 떠난 뒤의 허탈감으로 왕성했던 그의 문학 활동은 서서히 사그라지게 된다.

1972년 12월에는 지병이었던 위궤양 악화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재수술을 받았고 1973년 1월에 퇴원했다.

사실 오영수는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참여문학이냐 순수문학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어찌된 연유였든 현대문학사의 실무에서도 물러앉았으며, 또한 심각한 위궤양으로 인한 2회에 걸친 수술 등으로 그의 정신과 육체는 온통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했기에 자연 속에서 영위할 수 있는 농촌생활을 좋아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도시의 물질문명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때부터 오영수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귀향ㆍ귀농 의식을 바탕으로 이상향을 추구하는 주제로 치닫기 시작한다. 이때 오영수의 작품은 「오지에서 온 편지」, 「삼호강」, 「실향」, 「황혼」 등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와 귀향ㆍ귀농 의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 동안 온갖 고민과 고통으로 육체와 정신이 쇠약해진 오영수는 고향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결국 1977년 3월에 홀로 낙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변해 버린 고향은 도시 문명에 지쳐서 안식처를 찾고자 했던 그의 상실감을 채우기에 너무 부족했고, 그것은 그에게 또 다른 실향 의식을 가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도 않고 사람들조차도 많이 변해버린 고향 언양 대신 그곳과 가까운 경남(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해서 그곳에서 3년 정도의 여생을 보내었다.

곡천리는 오영수의 고향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인 오덕술과 고모가 살고 있어 고향과 다름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한 농가를 구입하여 ‘침죽재(枕竹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낚시나 난을 키우는 취미 생활, 애견 ‘루끼’를 기르는 일,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 주민의 경조사에 부조금도 내는 등의 ‘이웃 만들기’ 활동, 제자들이나 문인들이 찾아오면 가까운 추어탕집으로 데려가 대접하기도 하고 막걸리를 나누면서 문단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자연과 농촌생활을 즐기며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그런데 귀향 역시 오영수에게 있어서 최선은 아니었다. 그 곳도 이미 도시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비극적 심정과 안타까움은 오영수의 말기 작품 경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듯한 그리고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파라다이스이자 노스탤지어인 이상향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작품들은 「두메 모자」, 「지나버린 이야기」, 「잃어버린 도원」에서처럼 자연과 인간이 완벽하게 합일될 수 있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그 주제가 형상화된다. 그런데 이야기 구성 방식은 주로 꿈이나 상상, 혹은 환상인지 아닌지 모를 듯한 애매모호하면서도 신비로운 형태로 풀려 나간다.

서울에서 곡천리로 내려온 오영수는 그 동안 부진했던 창작에 전념하여 쇠약해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는 제7창작집인 『잃어버린 도원』을 펴내기도 했다. 그런데 지병에 시달리면서도 꾸준히 창작활동에 전념하고자 했던 오영수는 그만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바로 1979년 1월 『문학사상』에 발표한「특질고」가 그 문제의 작품이었다.

사실 오영수는 「특질고」라는 작품을 씀에 있어서 여러 지방의 특질적 성격을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차원에서 고찰하고자 하려는 의도로 창작했었다. 그런데 오영수가 그의 유머스러운 기질을 발휘해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서술한 내용이 특정지역 토속인들의 특성을 크게 파헤친 셈으로 받아들여져 커다란 물의를 빚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평론가 이어령이 주간으로 있던『문학사상』은 사과문을 내고 석 달 동안 자진 휴간을 하였으며 오영수는 신문지상에 앞으로는 절필하겠다는 내용의 공개 사과문까지 게재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두 번에 걸친 위궤양 수술로 건강이 좋지도 않았고 나이도 연로했던 그는 이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 충격의 여파로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파동이 일어난 바로 그 해, 5월 15일 곡천리에서 간암으로 타계하게 되었다. 오영수는 곡천리에서 타계했으나 고향 언양에 있는 선산의 자연 속으로 영원히 귀의하였다.

농촌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았던 오영수는 파란만장했던 삶 속에서도 항상 일관된 의식을 가졌고, 문학 역시 그의 인생과 항상 일치했다. 삶에서도 문학에서도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고, 농촌에서의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했으며, 자연으로의 귀의를 주장했던 오영수는 죽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귀향을 한 셈이다.

[ 참고문헌 ]
이재근 「오영수 소설 연구」, 목원대 박사논문, 2011
이재인, 『오영수 문학 연구』, 문예출판사, 2000
정형남, 「향토에 묻은 오영수의 문학과 생애」, 『울산문학』 제19집, 199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