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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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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오영수

청년기

1926년 오영수는 언양보통학교를 졸업하지만, 그는 관비학교인 사범학교에도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학은 꿈꿀 수 없게 되었다. 아우 오양근의 회고담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글과 글씨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던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 가계를 돕기 위해 면사무소에 나가 잡일로부터 서기 일까지 두루두루 맡아 일을 했다”고 한다.

또한 한시에 능하며 내성적이고 보수적인 부친 때문에 그의 진로는 더욱 많은 제약을 받았다. ‘화쟁이가 될려면 부자(父子)의 의를 끊겠다’고 해서 그림을 못했고, ‘풍각쟁이가 될려거든 오늘부터 이 집을 나가라’고 해서 음악을 못했다. 사실 공부도 잘 하는 우등생이었고, 예술방면에서도 다재다능했던 오영수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겪었던 이와 같은 좌절은 오영수로 하여금 더욱 고독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을 달래줄 수 있었던 독서 취미는 자연스럽게 문학으로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오영수는 모교의 추천으로 우편국 사무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그가 받는 7원의 월급과 그의 모친 손씨가 삯바느질로 번 수입으로 가족 6명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우편국장의 말에 큰 의지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 무렵을 전후해서 오영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동아일보>에는 「병아리」(1927.5.25) 한 편을 발표했고, <조선일보>에는 「술 자신 우리 아버지」(1929.11.10.), 「눈 마진 내닭」(1929.11.30.), 「도토리밥」(1930.1.22.), 「뎐신대」(1930.1.25.), (1930.2.20) 등 다섯 편을 발표했다.

그런데 2년 가량 우편국에서 근무하던 중 공부를 시켜주겠다던 우편국장이 죽자 1931년 오영수는 1차 도일(渡日)을 하여 오사카에서 신문 배달을 하며 이듬해 1932년에 나니와(浪速)중학교 속성과를 수료한다. 그러나 끼니를 굶기까지 하는 궁색한 집안 형편 때문에 도저히 더 이상의 공부를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오영수는 공부에 대한 미련을 접어 둔 채 부친이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받고 부득이 귀국하여, 고향인 언양에서 면서기로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오영수는 얼마 동안 일을 하면서 집안의 빚을 정리하여 주고, 다시 향학열에 불타 1935년에 2차 도일(渡日)을 한다. 그는 도쿄의 어느 실내 장식사에 말단 직공으로 다니면서 일본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나, 각기병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귀국하였다. 오영수는 실내 장식사에서 배운 솜씨를 발휘하여 인근 읍촌에서 도장(塗裝)과 간판 일을 하면서 빚을 갚고 생계를 꾸려갔다. 또한 그의 사촌형이 있었던 경북 예천읍에서 두 해 동안 간판을 그리면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가 했던 실내 장식이나 미술 공부는 그 이후 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게 되는 일이나, 그의 소설이나 취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간판 일을 하면서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오영수는 학문에 대한 미련으로 1937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국민예술원에 입학을 하여 2년 만에 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오영수는 1938년, 8세 연하인 김해 김씨 정선(貞善)과 결혼을 하게 된다. 오영수는 고향에서 ‘청년회관’을 열고 마을 젊은이들에게 역사와 한글, 연극과 음악 등을 가르쳐 일본 경찰들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의 가속화로 급기야 청년회관도 문을 닫게 되고 문학의 꿈마저 좌절되어 버리자 오영수는 언양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아내에게 가족의 생계를 맡기고, 1942년 만주 신경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우연히 일본에서 장식사 직공으로 같이 일했던 요내다(米田)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장식업자로서 일하다가 향수를 견디지 못하고 1943년에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귀국한 오영수는 만주에서 벌어온 돈으로 고향에서 진 빚을 모조리 청산하고 그의 아내가 일광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해안국민학교로 전근됨에 따라 오영수도 함께 일광면 화전리로 이사를 한다. 그의 처형의 알선으로 일광면의 서기가 되어 비교적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의 생활은 후에 오영수의 대표적 작품인 「갯마을」의 배경이 되었다.

1943년 당시 일광면에서 가까운 기장 좌천에는 김동리의 백씨였던 김범부가 피신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오영수는 김동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1945년 해방이 되고, 그 해 12월에 오영수는 부산 경남여고에 미술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교직생활을 시작하면서 오영수는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시기에 『중성』에 「바다」(1946), 『백민』에 「山골아가」(1948)와 「六월의 아침」(1949)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하기 이전에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4년 후 1949년 9월에 오영수는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여 등단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오영수는 문단에 데뷔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 참고문헌 ]
이재근 「오영수 소설 연구」, 목원대 박사논문, 2011
이재인, 『오영수 문학 연구』, 문예출판사, 2000
정형남, 「향토에 묻은 오영수의 문학과 생애」, 『울산문학』 제19집, 1992.12